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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캐나다 대륙 왕복횡단 자동차 여행

캐나다 대륙 왕복횡단 자동차 여행


[권태명]

출근차량이 러시를 이룬 이른 아침시간인데다 도로시스템이 복잡해 30여분을 달려 겨우 토론토를 벗어나 캐내다 대륙 동서를 잇는 고속도로 trans Canada highway로 진입했다. 토론토에서 서쪽으로 뻗은 고속도로는 교차로도 없이 차선만 바꾸면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연결되기 때문에 처음 가는 운전자에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더욱이 출퇴근시간은 시속 백km 이상으로 달리는 차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에 미리 차선변경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토론토를 벗어나 한 시간 남짓 달리자 오른 쪽으로 산줄기가 이어지고 왼편으로는 바다 같은 휴런 호(Lake Huron)가 펼쳐졌다. 가끔 도로 양 옆으로 낮은 벼랑이 협곡을 이루기도 했다. 산길은 서부 온타리오(Ontario)주가 끝나는 케노라(Kenora) 시까지 1,000km 가까이 이어졌다. 서쪽으로 진행하면서 점차 도로의 굴곡이 심해지고 코발트 빛 맑은 호수 면에 드리워진 가문비나무(Spruce)그림자가 때 마침 수면을 스치는 여름 산바람을 타고 도화지에 번지는 그림물감처럼 잔잔하게 모습을 바꾸어 갔다.

이어지는 길 옆 바위마다 원주민 들이 돌을 포개 만든 이눅슉(Inuksuk)의 조형물이 일정한 



▲ 이눅슉

간격으로 길게 이어졌다. 두 세 개의 돌을 쌓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거의 완벽하게 사람모습을 형상화한 것에 이르기 까지 모양도 가지가지였다. 이눅슉은 본래 북극지역에 사는 원주민인 이뉴잇(Inuit)이 겨울사냥을 떠난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표지석이 그 기원이다. 집을 나선 극지방 원주민들에게 이 표지석은 때로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 수도 있는 생명의 길잡이였다. 이눅슉이 ‘사람역할을 하는 것’을 뜻하는 데서도 그 중요성을 알 수가 있었다.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이뉴잇은 북극권의 시베리아 극동지역과 알래스카 중서부, 캐나다 북부, 그리고 그린란드의 툰드라 지대에 살고 있는 몽골계 원주민을 말한다. 이 가운데 알래스카 에스키모는 유픽(Yupik)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에스키모는 인디언 말로 ‘날고기를 먹는 사람’을, 그리고 이뉴잇은 ‘사람’을 의미한다. 현재 에스키모는 극지방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으며 지역별로는 그린란드가 41,000명, 알래스카 32,000명, 캐나다 12,000명, 그리고 동북시베리아가 1,200명 선이고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눅슉은 길안내 외에도 사냥터나 낚시터와 음식물이 저장되어 있는 곳과 위험한 장소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고 집 나선 사람들에게 휴식처가 되기도 하며 오가는 사람들 서로 간에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하는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교통, 통신수단과 숙박시설이 이처럼 발달한 편리한 시대에 고속도로변에 이처럼 많은 이눅슉을 세워놓은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궁금증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1867년 캐나다 연방이 탄생한 뒤, 연방정부는 원주민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온타리오 주와 대초원의 북부 및 노스웨스트 준주(準州)의 일부를 원주민에게 할양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토지이양에 관한 구체적인 조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소유권을 주장하는 원주민의 소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7년 캐나다 대법원은 유럽인들이 캐나다에 도착하기 전 원주민들이 거주했던 지역에서 양자 간의 조약에 의해 이양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는 토지사용권리가 원주민에게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캐나다 정부당국도 원주민들과의 영토분쟁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1999년 노스웨스트 준주의 동쪽 반 정도를 이누이트족에게 떼 주었다. 이것이 이누이트족의 자치지역인 누나부트(Nunavut) 준주이다. 누나부트는 이누이트어로 ‘우리의 땅’이란 뜻을 갖고 있다. 캐나다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허드슨 만(Hudson Bay) 북부의 모든 섬을 포함하고 있는 누나부트는 육지 면적만도 193만 ㎢로 캐나다대륙의 20%이고 한반도의 거의 10배에 이르는 엄청나게 넓은 땅이지만 인구는 29,200 명(2004년 기준)에 불과하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베핀(Baffin)섬에서 그린란드까지 가까운 곳은 4백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연중 대부분 눈에 덮여있는 동토이며 주수도인 이콰루이트(Iqaluit)를 비롯해 열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곳에만 마을이 있을 뿐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다. 누나부트의 주기(州旗)에는 북극성과 함께 이눅슉이 그려져 있다.

캐나다정부는 원주민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토지소유권을 포기하는 대신 보호구역을 지정하고 수렵과 어업권을 보장해주며 교육과 생활보조금의 지원을 약속했으나 원주민들은 여전히 공공기관이나 기업체취업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보조금도 넉넉지 않은 수준이어서 극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에 있다. 온타리오주 고속도로 변의 한 철교에 흰 페인트로 쓴 “This is Indian Land.” 라는 구호와 도로 옆에 세워 둔 이눅슉이 모두 원주민의 영토에 대한 강력한 권리주장의 표현임을 알 수 있었다.

캐나다에는 세 개의 원주민 그룹이 있다. 원주민에 대한 칭호가 미국에서는 선주(先住) 여부와 상관없이 ‘American Indian’으로 부르는데 반해 캐나다는 ‘Aboriginal peoples’로 표기하고 있어 적어도 명칭에서는 ‘선주민’임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세 개의 원주민그룹 중 ‘the First Nations’와 ‘the Inuit’이 선주민에 속하는 종족이고 프랑스인과 선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the Metis는 앞의 두 종족과는 구별되고 있다.

캐나다는 인구의 75퍼센트 이상이 동부의 온타리오 주와 퀘백(Quebec) 주, 그리고 서부의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 주에 몰려있으며 그나마 미국과의 국경선 인근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과의 국경에서 북쪽으로 300여 km만 올라가도 서부의 에드먼튼(Edmonton)과 켈거리(Calgary)나 사스카툰(Sascatoon) 등 몇 곳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인구가 수천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가 가물에 콩 나듯 한 형편이다. 캐나다는 면적이 998만 ㎢로 한국의 백배나 되는데 반해 인구는 고작 3천 5백 만 명 선에 그치니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사람이 살지 않아 몇 가닥 안 되는 도로도 금방 끊어지고 만다. 서쪽으로 갈수록 대륙횡단 간선고속도로도 대부분 2차선으로 좁아지고 그나마 한참을 달려도 오가는 차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간밤에 머문 모텔에 식당이 없어 관리인 노인의 소개로 길 건너편 레스토랑으로 갔다. 명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에서 안셀모 역을 맡았던 블라디미르 소콜로프를 빼닮은 60대의 모텔주인은 아내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내가 부러웠던지 미소 띤 표정을 지으며 아침 든든하게 들고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천천히 가라고 일러주었다. 인심 좋아 보이는 레스토랑의 뚱보 여주인이 어딜 가느냐고 묻기에 로키산을 넘어 유콘(Yukon)까지 다녀올 계획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꿈도 못 꿀 일이라며 잘 다녀오라고 활짝 웃었다.

북미대륙의 5대호 가운데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의 3분의 1 정도와 휴런 호의 3분의 2, 그리고 온타리오 호의 반 이상이 캐나다에 속해있다. 캐나다 대륙을 동서로 달리는 대륙횡단고속도로는 토론토 북쪽 150여km 지점인 미들랜드(Midland)라는 마을에서부터 1,200km가 넘는 선더베이(Thunder Bay)까지 왼편으로 슈피리어 호와 휴런 호의 북단을 손에 잡힐 듯 스치며 지나간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나타났다가는 숨고 숨었다가는 다시 펼쳐지는 바다 같은 호수와 대륙의 울창한 스푸르스 숲이 한 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 절경을 연출해 냈다. 캐나다 대륙에 호수가 많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호수가 참으로 많았다. 호수에 육지가 떠있는지 육지에 호수가 있는지 착각을 일으킬 정도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맑은 물을 담고 있는 크고 작은 호수가 끊임없이 지나갔다. 호수 위로 쏟아지는 한 낮의 햇살이 프리즘처럼 곱게 반사되었다. 크고 작은 호수가 200만개를 헤아린다고 하지만 공식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해지기 직전 온타리오 주와 마니토바(Manotoba) 주에 걸쳐있는 레이크 오프 더 우즈(Lake of the Woods)라는 호숫가의 작은 마을 케노라에 있는 모텔 베스트 웨스턴(Best Western)에 들었다. 크고 작은 섬이 떠 있는 호수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을에 있는 원주민 박물관을 찾아갔다. 모텔에서 가르쳐 준 곳으로 갔으나 그럴만한 건물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픽업 차 한 대가 오기에 세웠다. 차 문을 열자 술 냄새가 확하고 뿜어 나왔다. 그 곳 원주민이었다. 박물관을 찾는다고 했더니 개관시간이 9시라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차라리 가까운 위니펙(Winnipeg)에 있는 박물관으로 가는 게 낫다며 박물관 이름과 지도를 그려주었다. 아침부터 외국인여행자에게 술 냄새를 풍겨 미안했던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잡은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몇 푼 안 되는 정부보조로 어렵게 연명하며 마땅한 일이 없어 술에 중독되고 마약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그들의 삶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캐나다 대륙의 정 중앙지대인 마니토바 주부터 대평원이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서부 앨버타(Alberta) 주의 캘거리(Calgary)까지 1,500여km는 광활한 평원이 펼쳐진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얕은 구릉 하나 시야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10-20km에서 더러는 50여km에 이르는 직선도로가 보통이었다. 자동차의 속도를 시속 100km로 고정시키고 다리를 편 체 앉아있으니 차가 마치 정지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선이 미치는 멀리 끝자락에 하늘과 땅이 닿아있었다. 그 지평선 끝에 이르면 또다시 대지와 하늘의 경계선이 맞닿은 지평선이 나타났다.

캐나다 중부 대평원은 어디나 가장 높은 건물은 모두 곡물저장창고(Grain Elevator)였다. 넓



▲ 캐나다 중서부평원의 곡물창고

은 평야 여기저기에 아파트 15층 정도 높이의 대형 곡물저장창고가 서있고 그 앞으로 철도가 깔려있었다. 이 지역은 곡물수송기차가 대부분이고 가끔 화물차가 다니는 것 외에 여객열차는 없었다. 역이 따로 없고 곡물창고가 바로 역이었다. 2-3개의 기관차가 앞뒤에서 100여 량을 달고 다니기 때문에 기차가 지나갈 때 건널목에 걸리면 10여 분 정도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캐나다 중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인 위니펙시의 〈Man and Nature〉박물관에는 캐나다 원주민들의 살아 온 발자취와 사냥 때 사용했던 각종 도구와 의복, 장신구 등이 비교적 잘 정리돼있어 시대에 따라 변화한 원주민들의 삶의 내용을 알아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캐나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위니펙은 마니토바 주의 수도이며 중부캐나다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도시이다. 이곳은 겨울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추운 곳이다. 박물관 옆 차이나타운에서 오찬을 즐기면서 잠시 다리를 뻗고 쉬었다.

캐나다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 철, 우라늄 등 주요광물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임산자원은 무제한이라 할 정도이다. 국토의 25%가 삼림으로 덮여있다. 캐나다의 삼림은 가문비나무가 주종이고 지역에 따라 자작나무도 많다. 산을 덮고 있는 밀림의 수해(樹海)는 숨을 멈추게 하는 장관이었다. 서부가 가까워질수록 도로 옆으로 가끔 나타나는 야구장만한 크기의 대형야적장에 원목이 산처럼 쌓여있고 원목을 가득 실은 대형트레일러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목제야적장을 촬영하러 들어갔다 만난 한 직원은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없는 지방 소도시의 경우 제재소의 고용기여도가 상당히 높으며 인부 중 상당수는 원주민이라고 했다.

위니펙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달려 해가 서쪽 지평선에 한 발쯤 걸려있는 시각에 레자이나(Regina)라는 도시에 닿아 도로에서 가까운 모텔 퀄리티 인(Quality Inn)에 차를 세웠다. 레자이나는 사스카치완(Saskatchewan) 주의 수도이다. 인구는 18만 명으로 많은 편이 아니나 평원에 넓게 펼쳐진 큰 도시였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레자이나의 농산물전시회는 캐나다 최대 규모이다. 겨울 평균기온이 섭씨영하 20도 전후이나 영하 50도까지 내려간 기록도 있다.

다음 날 목적지를 캐나다 로키산맥의 남쪽 출발지인 밴프(Banff)로 잡았기 때문에 해가 뜨기 전 이른 아침 모텔을 나섰다. 레자이나에서 밴프까지는 1,000km를 조금 넘는 거리이다. 토론토를 떠나 나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열흘을 넘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날만 새면 계속 달리기만 하다 보니 시간인식감각이 무디어진 것 같았다. 사스카치완 주를 벗어나 앨버타 주로 들어서자 주변경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이 이어지고 곡선도로도 자주 나타났다.

캐나다대륙 석유매장량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앨버타 주는 천연가스와 목재, 축산산업 부문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캐나다에서 가장 부유한 주로 꼽히고 있다. 앨버타에서는 들판이나 구릉 가릴 것 없이 어디서나 수많은 오일펌프가 쉴 새 없이 기름을 퍼 올리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미국원유수입량의 20%를 캐나다가 공급하고 있을 정도로 캐나다는 에너지수출국이다. 특히 캐나다가 생산하는 원유의 45%가 유사(油砂)를 다량 함유한 다공성 사암(多孔性砂岩)인 오일샌드(Oil Sands)에서 나오는데 캐나다의 오일샌드 매장량은 베네수엘라를 제외한 전 세계의 매장량을 합한 양과 맞먹는 규모에 이르고 있다. 화석연료인 원유와 오일샌드의 대부분이 앨버타 주에 몰려있다.

해가 지기까지 아직 다소 여유가 있는 시각에 캐나다 제3의 도시인 캘거리에 진입했다. 1988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캘거리는 앨버타 주 남부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1만 년 전부터 블랙푸트(Blackfoot)라는 원주민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캘거리는 캐나다 로키산맥에서 80km 밖에 떨어져있기 않기 때문에 연중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7월에 열리는 카우보이 축제인 캘거리 스탬피드(Calgary Stempede)는 전국의 카우보이들이 모여 로데오와 역마차 경주를 벌이기 때문에 특히 인기가 높다. 캘거리의 별명이 카우타운(Cowtown)인 거나 미식축구팀의 이름이 캘거리 스탬피더스인 것도 모두 이 경기와 관련하여 지어진 것이다.



▲ 캐나다 로키산맥

캘거리 시내를 벗어나 휴게소에 들러 차에 기름을 채우고 밴프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20여 분 지나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광활한 공간이 펼쳐지면서 멀리 로키산맥의 위용이 아스라이 전개되었다. 멀리서 줌인(zoom in) 되는 파란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녹색의 가문비나무숲이 절경을 연출했다.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오가는 차도 많지 않았다. 해가 지기 직전 밴프에 닿았다. 밴프 시 앞에서 토론토로부터 나흘 동안 달린 3,500km의 trans Canada highway와 작별했다. 도중에 전화로 예약해 둔 모텔에 들었다. 산속이라 공기가 눈 시림을 느낄 정도로 맑았다. 다음날 아침 산 중턱에 자리한 모텔에서 내려다 본 밴프는 숲인지 마을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숲에 파묻혀 있었다. 3,000m에 이르는 캐스케이드(Casacade)산 자락에 성처럼 우뚝 솟은 스프링스 호텔(Springs Hotel)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밴프는 캐나다대륙횡단부설공사 때 설퍼(Sulphur)산 기슭에 온천이 발견되면서 관광지가 되었고 1887년 한 일대가 캐나다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아침 해가 뜨면서 런들산(Rundle, 2,949m)에 반사된 오렌지 빛깔이 정상에서부터 서서히 아래로 퍼져나갔다. 런들산은 알프스의 마터호른(Matterhorn) 봉우리를 빼 닮았다. 밴프 앞을 흘러가는 보우(Bow)강은 마릴린 먼로와 로버트 미첨이 주연을 맡고 1950년에 제작된 명화 〈돌아오지 않은 강〉의 촬영현장으로 유명하다. 뗏목을 타고 급류를 내려가는 장면과 흐느끼듯 느린 템포인 주제음악 “The River of No Return”은 1950년대 후반에 청춘을 맞았던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잔상으로 남아있는 장면일 것이다. 강의 휘어진 모양이 활을 닮았다 해서 보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강에는 지금도 보트놀이가 인기였다. 강가에 한 동안 서서 50여 년 전 그때로 잠시 돌아가 보았다.

 



▲ 밴프의 보우강

밴프를 뒤로하고 캐나다 로키산맥을 관통하는 길로 차를 몰았다. 북쪽 끝인 재스퍼(Jasper)까지 285km의 절경을 연출하는 산길이다. 50km남짓 올라가 루이스 호수(Lake Louise)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세계10대 절경의 하나로 꼽힌다는 루이스 호수는 빙하로 덮여있는 정면의 빅토리아산(3,464m)을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거대한 바위산이 호수를 감싸고 있다. 청백색의 잔잔한 호수 면에 거꾸로 선 빅토리아산의 빙하가 아침햇살에 유리알처럼 반사되었다.

잊을 수 없는 경관을 몇 장의 사진에 담은 후 호숫가 샤또 레이크 루이스(Chateau Lake Louise) 호텔라운지에서 커피잔을 앞에 놓고 잠시 여유를 즐겼다. 호텔은 주변 산에 등산길 개척하기 위해 1899년 이 곳에 왔던 스위스 등반가인 미첼 빈센트 일행이 묵었던 방 두 개짜리의 작은 오두막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루이스 호수에서 재스퍼까지의 산길은 길 좌우로 3,000m 안팎의 준봉과 간간이 나타나는 호수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절경의 연속이다.

루이스 호 서북쪽의 요호(Yoho)국립공원에 있는 에메랄드호수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요호는 원주민어로 ‘경이로움’을 의미하는 말이다. 요호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험한 산길이었다. 해발 3,000m에 이르는 높은 산 중허리에 70년이 넘은 캐나다태평양철도가 깔려있고 지금도 화물차가 다니고 있다. 산이 너무 높고 험해 마치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으로 나선형 터널을 건설했는데 명물이 되어있다. 도중에 수 십 량의 차량을 단 긴 화물차가 터널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 빛깔이 에메랄드와 같다 하여 붙여진 에메랄드호수는 이름대로 물색이 고왔다. 긴 세월 빙하가 녹으면서 흘러내린 빙퇴석이 계곡을 막아 생성되었다는 에메랄드 호수주변으로 숙박과 휴식시설이 잘 갖추어져 관광객이 많아 찾는 곳이었다. 호수 변에 수직으로 솟아있는 절벽산이 장엄했다.

요호국립공원에서 나와 다시 북행도로를 탔다. 캐나다 로키산맥은 최고봉인 로브슨산(3,954m)을 비롯하여 3천m 안 안팎의 늠연한 준봉들이 재스퍼까지 이어진다. 지상에서 3-4부 능선까지 스프루스 숲으로 덮여있는 외외한 회색 암산 정상이 태고의 만년설을 이고 있다. 언어의 조탁이 한계를 드러내는 절경이다. 길옆으로 간간이 나타나는 호수가 머리를 식혀주고 높은 산 중허리를 휘감아 도는 흰 구름이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었다.

반프와 재스퍼의 중간쯤에 있는 컬럼비아 아이스필드(Columbia Icefield)는 북미대륙 최대빙원이자 남북극과 함께 세계3대 빙원의 하나로 꼽힌다. 최고봉이 3,745m인 컬럼비아산 중앙에 큰 돔이 돋아있는데, 이 돔이 빙하생성의 중심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내린 눈이 30m쯤에 이르면 아래 눈이 압력을 받아 얼음으로 바뀌고 계속 눈이 쌓이게 되면 얼음이 두꺼워지면서 주변계곡으로 넘쳐내려 아래로 흘러가 빙하의 면적이 확대되어 간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빙하의 생성 보다 녹는 속도가 더 빨라져 문제가 되고 있다. 325㎢에 이르는 광활한 컬럼비아 아이스필드는 계절에 따라 지구기후변동에 심대한 영향을 주며 빙하에서 발원되는 물은 북극해와 태평양,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빙하가 가장 두꺼운 곳은 365m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컬럼비아 아이스필드는 영화 닥터 지바고의 로케이션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곳은 컬럼비아 아이스필드 발치에 해당하는 도로와 가까운 에사베스카(Athabasca) 빙원이다. 길 옆 샬레에서 표를 사 산중턱까지 버스로 올라가 거기서 빙원까지 다시 사람 키보다 큰 바퀴를 단 특수차량으로 갈아타고 올라갔다. 에사베스카 빙하는 해마다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빙하를 왕복하는 버스의 기사는 해마다 녹아내리는 빙하가 결국 자기를 실업자로 만들 것이라며 익살을 떨었다. 에사베스카 아래 도로 가까운 곳에는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미 제법 큰 호수가 생겨나 있었다. 에사베스카 빙하일대는 방한복을 입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낮은데도 빙하는 해빙기의 얼음처럼 푸석푸석하고 녹아내린 물이 아래쪽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키산맥 관통도로의 북 쪽 끝 마을인 재스퍼에서 시작되는 북행도로는 내륙의 알래스카 하이웨이(Alaska Highway)와 태평양쪽의 옐로우헤드 하이웨이(Yellowhead Highway)의 두 가닥이 있다. 옐로우헤드 하이웨이는 재스퍼에서 234km 지점인 태평양연안 항구인 프린스루퍼트(Prince Rupert)에서 끝나기 때문에 북쪽의 유콘 주까지 가려면 도중에 헤즐턴(Hazelton)이란 원주민 마을에서 케시어 하이웨이(Cassiar Highway)로 바꿔 타야 한다. 캐나다 원주민마을을 찾아보는 게 여행의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로 살고 있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서부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옐로우헤드-케시어 하이웨이를 선택했다. 맑은 물이 굽이치는 프레이저(Fraser)강을 옆으로 끼고 북으로 뻗은 옐로우헤드 하이웨이에 올라서자 상쾌한 아침공기가 전 날의 피로를 날려주었다. 재스퍼에서 유콘까지는 1,300km이며 이 중 케시어 하이웨이가 반이 넘는 724km가 케시어 하이웨이에 해당한다. 케시어 하이웨이는 굴곡이 많은 좁은 길이고 비포장부분이 일부 남아있으며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중앙선이 없는 도로이다. 또한 주유소가 많지 않아 비상휘발유의 준비를 권장하는 길이기도 하다.

재스퍼에서 60여km를 올라가자 캐나다 로키산맥의 최고봉인 3954m의 로브손산이 눈앞으 



▲ 캐나다 로키산맥의 최고봉 로브손산

로 다가왔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로브손산은 사람으로 치면 점잖은 모습의 산이었다. 이른 아침시간이라 오가는 차도 없고 해서 길 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쉼 없이 달리기만 한 장거리 여행에 다소 지쳐있던 아내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느긋하게 쉴 시간 없이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해지는 시간까지 자동차로 줄 곳 달리기만 했으니 아내에게는 다소 지친 일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0여분을 더 올라가다 사진에 설명을 곁들인 게시판이 줄지어 선 무인휴게소가 있어 차를 세웠다. 게시판에는 암으로 절단한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한 캐나다 소년영웅 테리 폭스(Terry Fox)가 암 연구기금모금을 위해 캐나다대륙을 횡단하는 ‘희망의 마라톤’을 결행한 얘기와 짧은 생을 마감한 감동적이고 애달픈 사연이 소개되어 있었다. 1980년 4월 12일 의족으로 캐나다 동쪽 끝 뉴펀들랜드(New Foundland)의 세인트존스(St. John’s)를 출발하여 하루 평균 42km씩 달린 테리 폭스는 도중에 폐암까지 앓게 되어 143일 만인 1980년 9월 1일 5,373km 지점인 온타리오 주 선더베이 시에서 달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은 이듬해 6월 28일 2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소년의 사망 후 그의 얘기는 캐나다는 물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이름으로 모금된 기부금이 수 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얘기였다. 그의 공적을 기려 만든 선더베이 시의 슈피어리어 호숫가 작은 공원에는 의족으로 달리는 소년의 동상이 서있다.

케시어 하이웨이가 시작되는 헤즐턴마을 가까운 곳에 기트산(Gitxsan)족 원주민이 사는 크산(‘Ksan)마을이 있고 마을 앞에 박물관이 있었다. 목제 벽이 까맣게 변색된 목조 2층 박물관 앞에는 10m가 넘는 ’Totem Pole‘ 이 여러 개 줄지어 서 있었다. 크산마을은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토템 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토템은 북미원주민들이 민족 또는 종족의 조상과 혈연관계가 있다고 보고 숭배하는 자연물을 말하며 독수리, 곰, 수달, 메기, 그리고 떡갈나무가 그 대상물이 되고 있다.

시간이 좀 일러 박물관이 닫혀있었다. 어쩔 수 없어 박물관주차장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 크산마을 기트산족의 토템폴

데 마침 한 노인이 나타났다. 다가가 인사를 하고 당신네 조상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어디서 오다니 무슨 말이냐며 우리조상은 예수가 탄생한 때 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어이없어했다. 우문을 던진 사람이 머쓱해졌다. 화제를 바꾸어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시간이 되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원주민 아버지와 스웨덴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백인 같은 여자관장은 반시간이 넘도록 그 곳 원주민역사와 현재 그들의 생활에 관한 얘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키타완가(Kitawanga), 키타완쿨(Kitawancool) 등 인근 7개 마을에 6,000여명의 원주민이 2,500년 넘게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청년들이 일부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목재회사에 취업해 있을 뿐 주민의 80%이상이 직업이 없는데다 정부보조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여자들이 지금도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관광수입이 그나마 다소 도움이 되고 있다면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일부 노인을 제외하면 자기들의 고유 언어도 구사하지 못하며 대부분 가정에서도 영어를 쓰고 있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원주민 말을 가르치고 있지만 배우기 싫어한다고 했다. 박물관을 나와 마을을 떠나는데 길 가던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티 없이 맑아 보였다.

빙하와 만년설로 덮인 북부 로키산맥의 준봉을 옆으로 비끼면서 이어지는 케시어 하이웨이는 맑은 호수와 협곡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인적 드문 오지 산길이었다. 유콘 주의 알래스카 하이웨이와 만나는 리아드(Liard)까지 724km에 이르는 캐시어 하이웨이는 100km가 넘도록 인가도 주유소도 하나 없는 구간도 있었다. 10여분을 달려도 오가는 차 한대 보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도로변 어디에고 광고판은 물론이고 마을 이름이나 거리를 알리는 이정표 하나 없는 게 가장 답답했다. 이 지역은 백인은 거의 없고 원주민들만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오지였다.

헤즐턴마을을 떠나 150여km쯤 진행한 지점에서 예상치 않은 일을 만났다.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도로에 10여대의 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얼마를 기다려도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아 내려서 앞으로 가봤더니 조그마한 판때기에 “12시부터 오후4시까지 교량공사”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시계를 보니 12시 20분. 10여분 늦어 4시간을 꼼짝 못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곳에 도착할 때까지 도중에 공사시간을 알리는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피할 그늘도 마땅찮은 데 하늘은 유난히도 맑아 한 여름 땡볕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산 속이라 점심도 거를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 교량이름이 내스(Nass)인 것은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날 묵기로 예정한 디스 레이크(Dease Lake)란 원주민 마을까지 350km정도가 남았는데 휘발유가 얼마 남지 않아 한 인부에게 물었더니 10여 km를 가면 마을에 주유소가 있다고 해 4시에 출발하여 인부가 알려 준 곳까지 갔으나 길가에 집만 서너 채 있을 뿐 주유소가 없어 그냥 지나갔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을 달려도 주유소는 물론 집 한 채 나타나지 않았다. 연료 계기판에 바닥을 알리는 적색신호가 켜지고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인적 없는 산길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는 알리지 않고 혼란스러워지는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10여분을 달렸을까, 길옆에 불 켜진 곳이 일단 들어갔더니 그곳이 바로 간이주유소였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디스 레이크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넘어서였다. 그날은 운이 닫지 않은 날이었는지 마을에 두 개밖에 없는 모텔이 모두 만원이었다. 할 수 없어 무작정 가까운 한 원주민 집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자 내줄 방이 없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처음 들렀던 모텔로 다시 갔다. 잠시 기다리라며 주인이 어디엔가 한참 전화를 하더니 예약손님이 너무 늦어 취소시켰다면서 그 방을 내주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티키인(Stikine) 강변에 있는 텔레그라프 크리크(Telegraph Creek) 마을로 차를 몰았다. 탈탄(Tahltan)족 원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서북캐나다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다. 마을 이름으로는 특이한 텔레그라프 크리크는 이곳이 1866년 캐나다 정부가 부설한 대륙 간 전선의 종점이 되어 붙여진 것이다.

디스 레이크에서 텔레그라프 크리크로 가는 길 120km는 절벽을 깎아 닦은 좁고 굴곡이 많은데다 경사가 엄청난 비포장도로였다. 처음 절반은 여느 산길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후반 길은 경사도가 18°에서 20°에까지 이르는 벼랑길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도로의 경사도는 어디든 가팔라야 대개 8° 안팎인데 차 안에서 내려다 본 20°의 경사도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듯 했다. 안내팸플릿에도 험한 길이기 때문에 초행여행자는 운전하지 않는 게 좋다고 소개되어 있어 짐작은 했지만 정말 무서운 길이었다. 왕복 5시간에 살수차 외에 만난 차라곤 다섯 대뿐이었다.

캐나다의 세랭게티라고 불리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서북부의 드넓은 스펫시지(Spatsizi) 고원에서 발원하는 스티키인 강은 서쪽으로 이어내려 텔레그라프 크리크마을 앞을 지나 알래스카의 랭겔(Wrangell)시 앞 태평양으로 흘러든다. 610km에 이르는 스티키인 강은 300m 전후의 수직절벽 사이를 흘러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은 곳이 있을 정도이며 협곡경관이 절경을 이루어 캐나다의 그랜드 캐년이라고도 한다. 강폭이 좁은 곳은 2m에 불과해 물살이 거친 곳이 많고 도중에 투야(Tuya), 탈탄, 이스쿠투(Iskut), 포큐파인(Porcupine)강 등 많은 지류가 합류된다. 강변을 따라 가끔 탈탄족의 주택이 한두 채씩 나타났다. 집집마다 무스의 거대한 뿔을 여러 개씩 처마에 메달아 장식한 특이한 모습이었다.



▲ 스티키인 강변의 탈탄족 주택

상류가 증류수처럼 깨끗하다는 스티키인 강의 가파른 비탈 여기저기에 탈탄(Tahltan)족 원주민의 빛바랜 목조주택이 산재해 있는 평화로운 텔레그라프 크리크마을에는 3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마을입구에서 70대 노인을 만났다. 인사를 건네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을의 역사를 물었더니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만년이 넘었다면서 자기들이 인간화석으로 불린다고 했다. 노인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 곳을 하늘아래 가장 살기 좋은 ‘에덴동산’으로 생각하고 수천 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벌채와 관광사업이 주된 돈벌이이며 거기에 약간의 정부보조를 보태고 순록사냥과 강에 넘치는 물고기로 생계는 그런대로 이어간다면서 스티키인 강이 자기들에겐 생명줄이고 어머니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스팻시지 고원의 광활한 툰드라에 3,000 마리가 넘는 순록을 비롯하여 산양 등 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백인에게는 수렵시기가 엄격하게 제한되어있지만 자기들은 언제나 사냥이 가능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면서 탈탄인들은 필요이상의 사냥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헤어지면서 잡은 노인의 손이 삭정이처럼 딱딱하게 느껴져 조금 슬픈 생각이 들었다. 묘마다 하얀 철책이 둘러진 마을입구의 언덕 위 공동묘지에서 내려다 본 스티키인 강변 경관이 한 폭의 그림이고 마을 중앙에 우뚝 솟은 자그마한 목조성당의 십자가첨탑이 주변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언젠가 TV에서 본 이 곳 출신 노부부 얘기가 문득 생각났다. 문명세계로 나가 살고 있으나 어릴 때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 해마다 여름이면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스티키인 강변 폐가를 찾아 옆에 천막을 치고 옛날처럼 사냥과 낚시를 즐기며 한 철을 산다고 했다. 그 생활이 그렇게도 자유롭고 행복할 수가 없다며 아이처럼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추억이 잠재해 있던 회귀본능을 깨우는 것일 까. 태어난 실개천을 찾아 수만리 길을 되돌아오는 연어처럼.

마을을 살피고 다니다 백인 한 사람을 만났다. 식당과 출판 일을 겸하고 있는 그는 탈탄족의 역사와 스티키인 강에 관한 책을 낸다고 했다. 일 년 가야 외국인은 한 사람도 보기 어려운 오지인데 어떤 사연으로 찾게 되었느냐며 의아해 했다. 캐나다 원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보고 싶어 찾았다고 했더니 얘기나 하자며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숙박과 음식점을 겸하고 있었다. 한 모퉁이에 별실처럼 구획된 작은 공간에 놓인 책상에 자료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주소를 남겨놓으면 책이 나오는 대로 한 권 보내주겠고 해 적어주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고 스티키인 강에 관한 책 한 권과 커피잔 한 개를 기념으로 샀다. 그의 아내는 탈탄족 여인이었다.

그의 전송을 받으며 차를 되돌렸다. 2시간 반 남짓 후 닿은 디스 레이크에서 다시 북으로 올라가는 케시어스 하이웨이를 타고 이번 여행의 반환점이 될 유콘 주의 왓슨 레이크(Watson Lake)로 향했다. 왓슨 레이크 까지는 250여 km. 케시어스 하이웨이가 유명한 알래스카 하이웨이와 만나는 지점인 유콘 주의 어퍼 리아드(Upper Liard)마을에서 차를 남으로 돌려 왓슨 레이크(Watson Lake)로 내려갔다. 인구가 1500명을 조금 넘는 수준인 왓슨 레이크는 유콘 주에서 세 번째 가는 도시로 1898년 선주민 아내와 이곳에 정착한 미국인 프랭크 왓슨의 이름을 딴 것이다.

도로변에 길과 도시와 마을과 차량번호 등 온갖 표지판을 메 단 기둥이 숲을 이루는 왓슨



▲ 왓슨 레이크의 Sign Post Forest

레이크의 ‘Signpost Forest’는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보고 가는 명물이 되어있다. 사무실 여직원에 물었더니 표지판은 현재 7만 개를 넘어섰다며 해마다 2천 여 개씩 늘어난다고 했다. 1942년 알래스카 하이웨이건설공사 때 동원되었던 미국 일리노이 주 댄빌 시 출신 로버트 켐벨 병사가 향수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집까지의 거리를 적은 작은 팻말을 길 가에 세워두었던 것을 시작으로 그 뒤 여행자들이 하나 둘씩 기증하면서 오늘의 표지판 숲이 된 것이다.

해지기까지는 아직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알래스카 하이웨이를 타고 남행여로를 재촉했다. 6년 전 이 길로 캐나다 밴쿠버에서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자동차로 왕복하면서 받았던 진한 감동이 되살아 올랐다. 알래스카 하이웨이는 밴쿠버 동북쪽 1,200km 거리에 있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도손 크리크(Dawson Creek)에서 알래스카의 그랜드 정션(Grand Junction)까지 이어지는 2,275km에 이르는 도로이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알래스카 주둔 미군기지에 병력과 전쟁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1942년 3월 미국과 캐나다가 합동으로 착공한 이 도로는 일본이 그 해 6월 알류샨반도를 침공함에 따라 공사를 서둘러 8개월 12일 만인 1942년 10월 25에 완공한 군사도로였다. 미국과 캐나다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건설비용을 미국이 부담하고 전쟁 중 사용하다가 전쟁이 끝나면 사용권을 캐나다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했다. 이 도로의 공식명칭은 ‘Alaska-Canada Highway’이며 줄여서 ‘Alcan Highway’라고도 부른다. 알래스카 하이웨이는 2,275km중 알래스카 쪽은 319km에 불과하다.



▲ 알래스카 하이웨이 변의 문초호수

1948년부터 일반인 사용이 허용된 알래스카 하이웨이는 1996년 미국 토목공학협회로부터 세계최고토목공사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전후 캐나다는 노선확장과 여러 곳의 곡선구간을 직선으로 변경하고 도로주변의 환경을 개선하는 등 도로재정비에 힘썼다. 전 노선포장은 도로건설 50주년이었던 1992년에 완료되었다. 이 도로는 미국, 캐나다의 생산시설과 알래스카, 유콘의 자원을 연결하는 중요산업도로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관광 길로 더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7-8월 성수기엔 전 구간이 고급 레크리에이션차(RV)가 꼬리를 물 정도로 붐비는 세계적인 관광도로가 되어있다. 산과 강과 호수와 수목이 최상의 앙상블을 연출하는 이 길은 자동차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환상의 꿈을 경험하게 해준다.

 지금까지 북미대륙의 이름난 산과 대평원과 사막과 해안 길을 수십 차례 경험해 보았으나 알래스카 하이웨이를 넘어설 곳을 만나질 못했다. 이른 아침 새끼를 데리고 길가에서 풀을 뜯는 어미 곰을 비롯하여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겅정겅정 얼른 숲 속으로 숨어버리는 겁 많은 무스, 사람도 차도 아랑곳없이 도로 한 가운데로 유유히 산보를 즐기는 버펄로 떼와 길에서 부지런히 미네랄을 핥아먹는 산양가족, 그리고 엘크와 염소 등의 야생동물. 수시로 마주치는 이들은 이 길의 빼놓을 수 없는 조연들이다.



▲ 알래스카 하이웨이 상의 버펄로 떼

왓슨 레이크에서 두 시간 남짓 내려가 해지기 직전 길 옆 작은 모텔로 갔으나 만원이었다. 50km 남짓 더 내려가면 포트 넬슨(Fort Nelson)인데 거기 모텔이 몇 개 있다고 일러주며 주인이 미안하다고 했다. 포트 넬슨은 알래스카 하이웨이에서는 제법 큰 도시로 6년 전 북쪽으로 올라가는 여행 때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던 곳이다. 연속되는 산길여행에 아내가 좀 지쳐있었다. 라마다 인에 방을 잡아놓고 바로 6년 전의 그 중국집으로 갔다. 실내가 더 깨끗하고 음식 맛도 더 나아진 듯해 그 때 얘기를 했더니 주인이 바뀌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다음 날 일찍 모텔을 나서 오전 10시 조금 넘어 알래스카 하이웨이의 남쪽 출발지인 도손 크리크에 닿았다. 알래스카 하이웨이진입로 옆 작은 철도공원에 미군공병이 맨 처음 하이웨이진로를 측량했던 장소에 삼각형 모양의 철주를 세우고 그 위에 “YOU ARE NOW ENTERING THE WORLD FAMOUS ALASKA HIGHWAY” 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있고 그 아래 첫 측량지점에 피라미드형의 돌탑(cairn)을, 그리고 그 옆에 손을 들어 북쪽을 가리키며 측량하는 미군병사의 동상을 세워 놓았다.



▲ 도손 크리크의 알래스카 하이웨이 출발원점

주민이 600명에 불과했던 작은 마을 도손 크리크는 1942년 3월 어느 날 알래스카 하이웨이 건설공사에 투입될 1만 명의 미군공병을 실은 기차가 도착하면서 하루아침에 붐타운(boom town)이 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마을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알래스카 하이웨이의 출발 원점인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고 여행안내소의 여자직원이 일러주었다. 마을의 작은 광장에는 “MILE ’0’ ALASKA HIGHWAY” 라고 쓰고 그 위에 목적지의 이정표를 적은 흰색 기둥이 서있다. 현재 약 12,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도손 크리크시의 이름은 1879년 이 지역을 측량한 지질학자 조지 도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손 크리크에서 3시간을 달려 앨버터 주의 에드먼튼을 거쳐 사스카치완 주의 사스카툰에 이른 때는 이미 어둠이 짙어진 시각이었다. 여행은 언제나 갈 때 보다 귀가 때 재미를 덜 느끼게 되어있다. 더구나 돌아가는 길이 같은 길일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캐나다 대륙횡단 도로는 일부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한 가닥뿐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좁다. 다음 날 아침 8시 조금 넘어 여행안내소를 찾아갔다. 시간이 일러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대가 왔다. 차에서 내린 60대 초반의 부부와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퀘벡에 살고 있다는 그는 45일 전에 퀘벡을 출발하여 미국남부로 내려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한 후 돌아가는 길이라며 그 날까지 15,000km를 달렸다고 했다. 사스카툰에서 퀘벡까지 아직 4,000km나 더 남은 거리이니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더니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영어를 못한다며 남편이 웃었다. 미국이나 캐나다를 여행하다 보면 여러 모양의 여행자를 만나게 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자전거에 커다란 가방을 앞, 뒤, 옆으로 가득 메고 인가도 드문 산길을 힘겹게 달리는 외로운 방랑자를 만날 때이다.

미리 예상은 했지만 여정이 긴데다 원주민들 마을이 대개 도시와는 먼 외딴 곳이어서 교통과 잠자리가 불편하고 곡절도 많았으나 보통 여행에서 맛보기 쉽지 않은 재미가 있었고 공부도 되었다. 지금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5,000km를 넘는 자동차여행을 스무 번 넘게 했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긴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도중에 여름감기로 사흘 동안 목이 완전히 잠겨 모든 대화를 필담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이 기억에 남을 경험이 되었다. 가다가 졸리면 길 옆 아무데서나 잠깐 눈을 붙이고 아내가 졸면 노래를 부르며 졸음을 쫓았다. 운전을 못하는 아내는 카메라를 간수하고 지도책을 펴 주면서 그런대로 조수역할을 잘 해 주었다. 토론토 귀환은 떠난 날로부터 14일 뒤였다. 차량 계기판에 11,230km의 주행거리가 추가되어 있었다. 캐나다 서쪽 끝 밴쿠버에서 동쪽 끝 노바스코시아의 핼리팩스(Halifax)시까지의 왕복거리인 12,364km 보다 조금 짧고 인천에서 뉴욕까지의 11,011km 보다는 약간 먼 거리였다.